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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다압 섬진진터 석비좌대

두꺼비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

  • 주소 (57709)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 섬진강매화로 1497
  • 전화번호061-797-2418
  • 문화재지정문화재자료 제262호
광양 다압 섬진진터 석비좌대 사진1
요약정보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일명 매화마을)에 위치한 섬진나루터는 조선전기까지는 나루터로만 이용되다가 임란 직후 군사적 요충지 역할이 추가되어 섬진진으로 거듭난 곳이다.


숙종 31년(1705)에는 정식 수군진이 설치돼 수군장교인 별장 1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1895년 진이 폐쇄되기까지 4척의 병선과 2~3백명의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현재 섬진나루터에는 섬진진의 책임자인 수군별장들의 공적비 좌대 (섬진진터 석비좌대)인 두꺼비석상이 4개 남아 있다.  또한 섬진나루터는 섬진강 이름의 유래가 된 두꺼비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상세정보

섬진진터는 섬진진(蟾津鎭)이 있었던 자리이다. 문헌상으로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군사를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이곳에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군사를 뽑기 시작했으며, 숙종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영의 직할 진(鎭)으로 승격했다가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쇄되었다.

 

다압이 강 건너 하동으로 연결되는 군사요충지였음을 고려하면 좌대에 세워진 석비는 수군 별장(別將)들의 공적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17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4기만 남아 있다. 돌로 된 두꺼비 모양 좌대는 길이 125~148cm, 높이 51~58cm이고, 등에는 비신을 올려놓을 수 있다록 홈이 파여 있다.

 

두꺼비상은 치아가 빠진 입, 간략한 발, 독특한 머리 모양 등 조선시대의 투박한 조각 기법을 잘 보여준다. 좌대를 두꺼비 모양으로 만든 배경은 고려 우왕 때 섬진강 하구로 왜구들이 침입해오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나타나 떼로 울부짖어 달아나게 했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꺼비 나루'를 뜻하는 '섬진'이라는 이름도 그때 생겼다고 한다.

광양 다압 섬진진터 석비좌대 사진1
  • 광양 다압 섬진진터 석비좌대 사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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