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권

  • 글자크기
도지정유산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기묘사화

  • 주소 (57734) 전남 광양시 광양읍 신재로 110(봉양사)
  • 전화번호061-797-2418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1
상세정보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호남을 대표하는 학자인 최산두(崔山斗, 1483~1536)를 기리기 위해 영조 51(1775)에 건립되었다. 유허비가 위치한 봉양사(鳳陽祠)는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朴世煦, 1494~1550)와 최산두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선조 11(1578)에 세워졌다.

 

광양 출신인 최산두는 중종 8(1513)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지냈다. 덕행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나, 중종 14(1519)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동복(오늘날의 화순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많은 학자들과 교유(交遊)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유희춘(柳希春, 1513~1577) 등 호남의 이름난 학자들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비석은 받침돌과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문은 당시 순천부사였던 김약행(金若行, 1718~?)이 지었다. 비문에는 최산두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유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의 특성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1482~1536)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기묘명현은 조선 중종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은 사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37세 최산두는 화순 동복으로 유배됐다.


점필재 김종직과 한훤당 김굉필의 학맥을 이어받은 그는 유배지로 찾아온 많은 학자들과 교유했다.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 등 당대 호남 최고의 학자들이 그에게 사사했다. 최산두는 유배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보고 중국의 적벽(赤壁)에 버금간다 하여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15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곧 눈을 감았고, 1578년 이곳에 봉양사가 세워지면서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와 함께 배향되었다. 유허비는 1775년 봉양사 입구에 세워졌다. 순천부사인 김약행이 그의 행적과 봉양사 연혁, 조광조 등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그의 행적과 조선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1
  •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1
  •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2
  •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3
  • 광양 신재 최산두 선생 유허비 사진4

콘텐츠 만족도 조사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0/100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관광과
  • 연락처061-797-3717
  • 최종수정일 2024년 02월 16일
공공누리의 제 4유형[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 출처표시,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