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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덕과 절개를 숭모해 건립한
조선시대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이 중종 때 신진세력으로 정치개혁에 앞장섰던 "신재 최산두"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숭모해 건립한 것으로, 최산두 선생의 유허비와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봉양사는 1577~1580년 사이에 광양현감을 지낸 정숙남이 최산두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후 박세후가 추배되었고, 1868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7년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의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1482~1536)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기묘명현은 조선 중종 때인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조광조 등과 함께 화를 입은 사림을 카리키는 말이다. 37세 최산두는 화순 동복으로 유배됐다.
그는 15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곧 눈을 감았고, 1578년 이곳에 봉양사(鳳陽祠)가 세워지면서 광양현감을 지낸 박세후와 함께 배향되었다. 유허비는 1775년 봉양사 입구에 세워졌다. 순천부사인 김약행이 그의 행적과 봉양사의 연혁, 조광조 등 당대 신진사류들과의 교류에 대해 기록했다. 그의 행적과 조선 사림의 형성과 역사적 성격, 지역문화 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