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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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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양이 인재의 고장인가?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남긴 명언
  • 호남인은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맨 먼저 수호자로 나섰음.
  • 외세에 항쟁, 동학농민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5·18광주민중항쟁 등
조선시대 사화기(史禍期)에 많은 호남인이 의로움과 절개로 맞섬
광양도 우국충절의 고장답게 많은 애국지사가 탄생
  • 근·현대사에 들어 정계와 법조계에 광양인의 진출이 두드러짐
한때는 사무관급 이상 공직자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고장으로 알려짐
지금도 매년 마다 타지역보다 많은 고시합격자가 배출되고 있음(2011년 4명)

풍수지리설에 나타난 광양의 정기

백운산에는 신성한 정기가 흐른다
  • 예로부터 봉황, 여우, 돼지 등 3가지의 영험한 동물 기운을 간직
    (봉황의 정기최산두, 여우의 정기월애부인, 돼지의 정기큰부자의 땅)

    ※ 큰 부자의 땅- 제철소, 컨테이너부두, 재정자립도 전남1위, 약속된 미래

  • 광양처녀가 아기를 낳을 때는 백운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친정인 광양에 와서 출산을 한다.
"朝鮮之 全羅道요, 全羅道之 光陽이라."
  • 조선 영조3년 어사 박문수의 광양예찬
  • 비단 자연환경 뿐만 아니라 광양의 정기를 읽어낸 말이 아닌가 함

광양 사람의 근성

한마디로 끈기와 강한 생활력, 치밀성과 실천력으로 표현할 수 있음
광양사람을 한마디로 나타내주는 말들
  • '광양사람은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뻘 속 십리를 간다.'
  • '광양의 죽은 송장 하나가 순천의 산 사람 셋과 맞먹는다.'
  • '광양여자가 순천남자한테 시집을 가면 잘 살지만, 순천여자가 광양남자한테 시집오면 게을러서 못 산다.'
  • '광양 큰 애기한테는 두말도 않고 장가든다.'
  • '옛날에 광양사람이 순천에서 광양까지 수 만 마리의 벼룩을 풀숲으로 몰고 왔는데, 광양에 도착해서 세어보니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고 다 몰고 왔더라.'

광양의 인물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
  • 한국 풍수지리설의 원조(비보사상), 선종사상의 대가
  •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과 고려 건국을 예언
    (왕건의 출생 시부터 교육을 맡은 스승이었고 고려 창업에도 도움을 줌)
  • 827년(통일신라 흥덕왕2년) 영암군 월출산 성기동에서 출생하여 898년(효공왕2년)에 72세의 나이로 백계산 옥룡사에서 입적하였음.
  •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 화엄사에서 승려가 된 후 20세인 846년 (문성왕 8년)에 곡성 태안사 에 들어가 혜철스님의 문하에서 불법을 배움
  • 운봉산, 태백산을 돌며 참선하다가 백계산 옥룡사에 들어와 35년간 수도
  • 고려 현종 때 대선사(大禪師), 숙종 때 왕사(王師)에 봉해지고 인종 때 선각국사(先覺國師)의 시호가 내려짐
  • 옥룡사는 1598년(정유재란)때 화재로 소실된 후 17세기 후반부터 중건 되었으나 1878년 화재로 전소
  • 현재 시에서는 1997년부터 대대적인 발굴·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음
김 책(金 策)
  • 고려 광종(光宗)대에 정치개혁을 위해 실시된 과거제로 등제(登第)
  • 광종이 군신들에게 베푼 연회에서 친히 공복(公服)을 하사하였다고 함
  • 실제로 광양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보한집(補閑集)에서 알 수 있듯이 학문이 아주 뛰어났다고 함

    ※ 補閑集 : 고려 고종 때 최자(崔滋)가 지은 시화집

김황원(金黃元) [1045∼1117]
  •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고문을 지어 海東第一이라 알려짐
  • 고려 예종(1112년) 정월에 翰林特講學士가되고, 禮部得郞, 國子祭酒, 翰林學士 역임
  • 예종 12년(1117년) 8월, 73세 나이로 별세
  • 평양 부벽루(浮碧樓)에서 통곡하며 썼다는 시가 유명함

    ※ 長城 한쪽에는 넘쳐 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 끝에는 점점한 산들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김약온(金若溫)[1059∼1140]
  • 예종8년(1113년) 12월에 知尙書都省事, 인종 즉위년(1124년) 5월에 參知 政事가 됨.
  • 우왕 원년(1375) 정월에 왕이 書筵을 두고 그로 하여금 스승으로 삼음
  • 조선조에 들어 光陽府院君에 봉하여 짐
신재 최산두(新齋 崔山斗) [1482∼1536]
  • 1482년(성종13년) 4월 10일 봉강면에서 출생
  • 백운산이 내린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남

    ※ 이름의 山은 백운산을, 斗는 북두칠성을 뜻함

  • 옥룡면 동곡리‘학사대’에서 10년 동안 수학
  • 1504년(22세)에 진사에 오르고 1513년 (3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
  • 홍문관을 거쳐 호당(湖當)에 오름
  • 1519년(중종14년) 기묘사화에 의해 37세 나이로 화순군 동복으로 유배
  • 유배지에서 15년 동안 많은 학자를 양성하다가 1536년 53세 일기로
  • 광양읍 우산리의‘봉양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음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 본관은 長水로 황희 정승의 후손
  • 1855년 음력 12월 11일 봉강면 서석촌에서 출생
  • 1874년(20세)에 상경하였으며 강위, 김택영, 이건창과 함께 한말 한국 문학의 4대 문장가로 활동
  • 1888년(34세) 생원에 응시하여 장원(성균관 생원이 됨)
  • 역사 비평서인‘매천야록’과 시문집‘매천집’, '매천속집'‘동비기략’저술
  • 1910년 한일합방의 치욕에 맞서 절명시를 남기고 56세 일기로 자결함
  • 1999년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됨(문화관광부)
  • 시에서 대대적인 생가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음
강희보(姜希輔), 강희열(姜希悅) 형제 의병장
  • 1560년경 봉강면 신촌마을에서 출생
  •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단성 (丹城-지금의 경상도 산청군)에서 왜군과 항쟁
  •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히 전사
    • 강희보 1593년 6월 27일 전사
    • 강희열 1593년 6월 29일 전사
  • 영조 40년에 강희보에는 형조좌랑(정6품) 강희열에는 병조참의(정3품)를 내림
  • 1998년 시에서 사당을 이전하고 동재·서재·삼문을 신축
황병학(黃炳學) 의병장
  • 진상면 출생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백운산 용성굴에서 병기를 제작 옥곡면 원유지구에서 왜병과 격전하였음
  •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자금 마련 활동을 벌이다가 평양에서 체포되어 옥사함
기타 자연을 이용할 줄 아는 광양인(참고)
전국 최초로 매화 집단재배시작 ⇒ 광양사람
  • 1930년대에 율산 김오천 선생에 의해 집단재배 시작
  • 그의 며느리인 청매실농원 홍쌍리 여사가 맥을 이음

    ※ 홍쌍리 여사는 신지식인으로 지정된 바 있음(매실)

전국 최초로 김 양식시작 ⇒ 광양사람
  • 1640년 태인도 김여익 공에 의해 시작됨
  • 김여익 공의 "김"을 따서 해태를 "김"이라 부름.
  • 김시식지를 통해 광양 김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음
    ☞ 넉넉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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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부서 문화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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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3년 0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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